"AI가 없앤다던 그 산업, 오히려 더 커졌다"
지난 8월 9일, 스타트업 뉴스레터 The Bear Cave·Not Boring 필진으로 알려진 트렁 판(Trung Phan, @TrungTPhan)이 흥미로운 차트 하나를 올렸다. 필리핀 IT·비즈니스 아웃소싱(IT-BPM) 산업의 고용과 매출 추이를 담은 이코노미스트풍 그래프였다. 그는 "챗GPT 출시 이후 필리핀 오프쇼어 산업(GDP의 8%)이 오히려 훨씬 커졌다. IT·비즈니스 아웃소싱 고용은 20% 늘어 190만 명이 됐고, 산업 매출은 30% 늘어 420억 달러가 됐다"고 적었다. 게시물은 하루 만에 13만 회 넘게 조회되고 좋아요 1000개, 리포스트 212회를 기록했다.
이 숫자가 낯선 이유는 명확하다. 생성형 AI가 등장한 뒤 가장 먼저 사라질 일자리로 지목된 곳이 바로 콜센터·데이터 입력·백오피스 같은 저부가 아웃소싱 업무였기 때문이다. "AI가 콜센터를 없앨 것"이라는 전망은 챗GPT 출시 직후부터 꾸준히 반복돼 왔다. 그런데 정작 그 산업의 진원지인 필리핀에서는 고용도, 매출도 동시에 늘었다.
통념과 데이터의 괴리 —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나
수치를 직접 대조해보면 X 게시물의 서술과 실제 업계 통계는 대체로 궤를 같이한다. 다만 기준 시점은 다소 차이가 있어 확인이 필요하다. 챗GPT가 대중에 공개된 2022년 11월 직전, 필리핀 IT-BPM 산업의 연간 매출은 325억 달러, 정규직 고용은 157만 명이었다(Manila Bulletin, 2023). 업계 협회 IBPAP는 2026년 말까지 매출 420억 달러, 고용 약 197만 명을 목표로 잡고 있고, 실제로 2025년 말 기준 고용은 이미 약 190만 명, 매출은 약 400억 달러 안팎까지 올라온 상태다(Outsource Accelerator, 2026).
정리하면 챗GPT 출시 시점 대비 고용은 약 21%, 매출은 약 29% 늘어난 셈이니 X 게시물이 인용한 "+20%, +30%"라는 수치와 거의 일치한다. 산업이 필리핀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8.2% 수준으로, "GDP의 8%"라는 언급과 부합한다(BusinessMirror, 2026). 다만 원본 이코노미스트 기사와 차트 원문("Back-office bonanza")은 이번 확인 과정에서 직접 대조하지 못했고, IBPAP 공식 로드맵 문서(IBPAP Roadmap 2028 PDF)의 수치로 교차검증했다는 점은 밝혀둔다.
| 구분 | 챗GPT 출시 직전(2022년) | 2026년(추정·목표) | 증가율 |
|---|---|---|---|
| 정규직 고용 | 약 157만 명 | 약 190만~197만 명 | 약 +21~25% |
| 산업 매출 | 약 325억 달러 | 약 400억~420억 달러 | 약 +23~29% |
| 필리핀 GDP 비중 | - | 약 8.2% | - |
출처: Manila Bulletin(2023), Outsource Accelerator(2026), BusinessMirror(2026), X 게시물(@TrungTPhan) 인용 수치 종합
대체가 아니라 증폭 — 국내 조직이 읽어야 할 신호
이 데이터가 흥미로운 진짜 지점은 "AI가 일자리를 없애지 않았다"는 단순한 결론이 아니다. IBPAP를 비롯한 업계 관계자들이 실제로 하는 말은 AI가 저숙련 반복 업무를 흡수하는 동안, 사람은 더 복잡하고 판단이 필요한 일로 이동했다는 것이다(AMRO Asia, 2026). 콜센터 상담원이 AI 챗봇에 밀려나는 대신, AI가 처리한 1차 응대 뒤에 남는 예외 케이스·고객 리텐션·품질 관리 업무로 인력이 재배치됐고, 오히려 한 사람이 커버하는 업무량과 매출 기여도가 늘어나면서 산업 전체 매출이 고용 증가율보다 더 빠르게 늘었다.
이는 한국의 스타트업과 기업에도 같은 방식으로 적용될 수 있는 신호다. AI 도입을 인력 감축의 명분으로만 접근하는 조직과, AI를 기존 인력의 처리 용량을 늘리는 지렛대로 설계하는 조직은 같은 기술을 쓰고도 전혀 다른 결과를 낸다. 특히 CS·운영·백오피스처럼 반복 업무 비중이 높은 팀일수록, AI로 확보한 여유 시간을 감원이 아니라 응대 품질·이탈 방지·데이터 기반 의사결정 같은 더 높은 부가가치 업무로 재배치하는 설계가 필요하다. 필리핀 사례는 그 재배치가 실제로 매출 성장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4년 치 실증 데이터에 가깝다.
고용 증가가 AI 덕분일까?
다만 이 글은 단일 X 게시물에서 출발한 정리라는 한계를 분명히 해야 한다. 트렁 판의 게시물은 원문 트윗이 잘려 있어 "AI is helping offshore workers in the..."로 문장이 끊긴 채 공개됐고, 그가 인용한 이코노미스트 스타일 차트의 원 기사 역시 이번 조사에서 직접 찾아 대조하지 못했다. 위 표의 수치는 IBPAP·필리핀 현지 언론 보도로 교차검증한 값이며, 트렁 판이 인용한 원본 이코노미스트 차트의 세부 수치(연도별 정확한 눈금값)와는 소수점 단위까지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또한 "매출·고용 증가 = AI 덕분"이라는 인과관계도 업계 관계자의 정성적 코멘트에 기반한 해석이지, 통계적으로 분리 검증된 인과관계는 아니다. 같은 기간 필리핀 페소 약세, 미국발 니어쇼어링 정책 변화, 글로벌 역량센터(GCC) 확장 등 다른 변수도 함께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AI를 조직에 도입할 때 이 사례를 인용하려면, "AI가 오프쇼어 산업을 살렸다"는 단정보다 "AI 도입기에도 산업이 위축되지 않았다"는 보수적인 해석이 더 안전하다.



